조금 깊은 생각

혼돈, 숙과 홀, 질서와 무질서, 규칙과 수치심

RayShines 2025. 11. 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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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보면 혼돈, 그리고 숙과 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쪽의 제왕 숙, 북쪽의 제왕 홀, 그 사이에 중간에는 혼돈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숙과 홀이 혼돈에게 사람처럼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었더니 혼돈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지요.

 

 

 

대부분의 창조 설화나 신화를 보면 태초에 혼돈, 그러니까 카오스 chaos가 있었고 창조는 그 혼돈을 질서로 전환하는 과정입니다.

카오스는 바닥이 없어 끝없이 추락하는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라고 하고, 하품하다는 그리스어 카이노 khaino 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비어 있는 공간을 준비, 배열되어 있는 공간으로 바꾸면서 세상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돈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질서(Chaos is order yet undeciphered)”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에서는 억지로 여느 존재처럼 일곱 개의 구멍을 냄으로써 인위적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혼돈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혼돈을 제거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라고 보고 있지만, 장자는 혼돈을 제거하는 것이 창조로 이어진다는 양의 행위라고 보기보다는 혼돈이라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체를 파괴하는 음의 행위라고 보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각 문명은 혼돈,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점에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과 빈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어둡고 막막한 밤하늘을 보며 개인의 보잘것없음을 깨달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하늘에 촘촘히, 하지만 무작위로 박혀 있는 별들에 억지로 패턴을 입히며 별자리라는 질서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포와 불안을 이겨냈던 것이겠지요. 우리 인간은 무질서, 혼란, 혼돈, 카오스를 두려워합니다. 눈앞에 혼란이 펼쳐지면 우리의 뇌는 즉각적으로 공포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속에서 패턴과 질서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억지로라도 패턴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뇌가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라는 소설에는 예이츠의 “재림” 첫 네 줄이 적혀 있습니다.

 

돌고 돌아 더욱 넓은 동심원을 그려 나가

매는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중심을 힘을 잃어,

그저 혼돈만이 세상이 풀어헤쳐진다.

 

Turning and turning in the widening gyre  

The falcon cannot hear the falconer;

Things fall apart; the centre cannot hold;

Mere anarchy is loosed upon the world,

 

 

 

모든 것, 그러니까 질서가 부서지고 나면 그 자리에는 혼돈만이 남습니다.

원은 너무 커진 나머지 자신의 중심이 어디인지도 잊습니다. 원은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연결입니다. 그 질서가 깨집니다. 그러면서 하품을 하는 혼란의 입, 그 안쪽의 끝없는 어둠의 공간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엄청난 공포감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의 삶에는 그래서 반드시 규칙이 필요합니다. 규칙이 없으면 인간은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빨리 변화하는 세상에는 황금률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며 초조, 불안, 공포가 엄습합니다. 너무 빠르게 세상이 변하니 원의 중심은 힘을 잃고, 우리는 중심으로부터 버려지는 느낌이 들며 요새 말로는 포모 FOMO 에 빠집니다. 규칙이 없다면 수치심도 같이 사라집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계속 유보됩니다. 중요했던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지고, 피상적 가치를 얻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든 거리낌 없이 하게 됩니다. 그런 행동을 하며 과거에 느꼈던 수치심은 혼란 속에 녹아들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숙과 홀은 질서로 혼돈을 죽였지만, 우리의 세상은 혼돈을 되살리는 대신 수치를 증발시켰습니다. 항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봤으면 합니다. 세상이 변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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