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아세디아 Acedia | 한낮의 악마 | 번아웃 | 영적 무기력

RayShines 2025. 11. 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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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디아 Acedia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무관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수도사들이 느끼는 영적 무기력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일종의 번아웃이지요.

 

초기 수도사들에게는 8가지 나쁜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4세기 수도승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가 정리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8개는 탐식, 색욕, 탐욕, 우울, 분노, 아세디아(영적 무기력), 허영, 교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기독교의 7대 죄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7대 죄악은 탐식, 색욕, 탐욕, 나태, 분노, 질투, 교만입니다. 영화 “세븐”에 등장하는 개념이지요. 잘 보면 대부분 비슷한데 이중 아세디아와 우울이 나태로 바뀌었고, 허영이 교만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세디아에는 한낮의 악마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노동과 기도를 반복하는 수도승들에게 영적인 무기력은 해가 높이 뜨고 저녁 시간까지 몇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점심 식사를 하고 퇴근이 몇 시간 남아 있을 때가 가장 지루하고 힘든 것 같습니다. 4세기 후반의 수도사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아세디아에 대해 “태양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하루가 50시간처럼 느껴지게 한다”고 썼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4세기 후반의 수도승도 했다니 신기합니다. 지금보다 그때의 삶이 훨씬 더 간단했을 것 같은데 그때도 인간은 똑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아세디아에 대한 해결책이 참으로 의외입니다. 바로 노동이었던 것입니다.

경전을 읽고, 기도를 하고, 일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인 수도승들이 영적 무기력을 느끼는데 오히려 더 일을 하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한 수도원장은 광주리를 만드는 재료인 종려나무 잎사귀를 주워 동굴 안에 모았고, 동굴이 가득 차면 정성껏 모아 왔던 종려나무잎을 모두 태웠다고 합니다. 어차피 태울 것이었다면 모을 이유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 목적은 잎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몸을 움직임으로써 한낮의 악마를 몰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울하고 공허하다고 하는 이들에게 “나가서 움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똑같은 것 같습니다.

 

어떤 게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 열심히 하면 지금의 문제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맞는지, 즉 지금의 문제는 나태의 문제이니 노력하라는 명령이 맞는지, 아니면 영적인 무기력, 혹은 현시대의 번아웃은 당신이 너무 열심히 해왔다는 증거일 테니 이제는 자신을 돌볼 시간을 갖고 푹 쉬라고 다독이는 것이 맞는지 말입니다. 선택지가 이렇게 극단적인 것 두 가지일 때는 언제나 그 중간 어디인가가 답일 때가 많긴 합니다만, 더 열심히 하라고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들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고, 학문적으로도 밝혀진 사실이기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게 무조건 좋은 조언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낮의 악마가 아니라 뒤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악마에 쫓겨 다닙니다.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불안해하고 그래서 늘 지쳐있습니다. 누구나 번아웃되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일이 힘들고 지켜서이기도 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트레드밀 위에 강제로 놓여진 기분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걸음을 멈추면 바로 뒤로 밀리며 트랙에서 탈락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지요. 남들은 저렇게나 빨리 달려가는데 나도 달려가야 중간이라도, 평균이라도 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우리를 더 열심히 달리라고 채근합니다. 수도승들은 그저 밤이 오길 기다리며 한낮의 악마와 싸웠다면 우리는 멈추는 순간 떨어지는 낭떠러지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 악마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여유를 찾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정말 우리는 한없이 뒤처지며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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