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빅토리아 시대의 다윈 | 찰스 다윈 |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 진화론 | 자연선택설 | 종의 기원

RayShines 2022. 6. 2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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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으며, 자연선택설을 발견한 뒤 20년이나 흘러서야 이를 발표했다. 

 

가장 위대한 천재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다윈은 1809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19세기 영국은 그 기간의 대부분을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에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특별히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시대를 이해하려면 그 배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18세기 전반에 영국은 면직물 사업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하지만 영국은 인도에 비해 기술력은 부족한 반면 인건비는 너무 비쌌기 때문에 경쟁력이 매우 낮았다. 하지만 1760년 경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전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으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영국은 극적으로 면직물에 대한 경쟁력을 높여나갔다. 


일반적으로 도시가 커지고 인구가 밀집하면 난방과 요리를 위한 연료의 요구량도 늘어난다. 이런 이유로 1600년대 영국 남부 지역의 산림이 황폐화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의 수도 런던 인근에는 석탄 광맥이 있었고 영국인들은 이를 연료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표층의 석탄이 고갈됨에 따라 영국인들은 더 깊이 파 내려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던 중 지하수맥을 건드려 작업이 어려워지자 지하수를 퍼낼 방안을 고민하다가 증기로 피스톤을 움직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캐낸 석탄을 광산에서 해안까지 운반하는 데에도 증기기관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기술력이 축적되며 1790년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해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가 개발되자 영국은 인도의 실 생산량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실이 넘쳐나자 자연스럽게 증기기관을 이용해 천을 짜는 방직기까지 개발되었다. 자국 면직물이 강력한 비교우위를 가지게 되자 영국은 자유 무역을 옹호하며 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식민지를 점령해나가며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그 우위를 19세기 내내 유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 황금기에 영국의 왕이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경제적 풍요와 종교적, 문화적 규제가 공존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 18세 소녀의 몸으로 즉위해 1900년까지 왕위를 지켰다. 그래서 이 시기를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 우위를 제국주의로 완성하며 엄청난 부를 이루어냈다. 물질적 풍요에 빠진 영국의 중간계급은 번영, 성공, 우월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이상화했고, 자신들의 우월함을 뽐내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진리와 종교에 경도되었다. 물질적 풍요 앞에서 품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탐닉을 경계하는 것이 진정한 미덕인 시기가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손이 한가하면 나쁜 짓을 한다는 속담이 유행하며 고상한 취미를 가지는 것이 권장되기도 할 정도였다.


위의 논리는 물질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성적인 욕망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성적인 욕망은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것이어야만 하며, 그것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것을 좇아 노예가 되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논리가 적용되는 것은 여성들 뿐이어서 남성들은 얼마든지 매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혹한 도덕적, 종교적 규준으로 인해 빅토리아 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성도덕은 성녀가 아니면 창녀라는 극단적 이분법으로 갈라졌다. 


다윈은 16에이커 대지에 살았다. 1에이커가 1200평 정도이므로 우리나라 단위로는 19,200평이나 되는 대지에 살았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의사였고, 아버지 로버트 다윈도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다윈의 아버지는 다윈이 의사가 되길 바랐다. 그런데 다윈이 의학 공부에 적응하기 어려워하자 다윈의 아버지는 다윈에게 성직자가 되라고 권유했다. 당시는 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믿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요새 표현으로 “지적 설계”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다윈은 동물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 신학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그리고 명분을 가지고 자연을 연구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 

 

 

거대한 존재 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다윈 이전 중세 유럽에는 거대한 존재 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달의 영역을 경계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로 분리된다. 인간의 영혼은 천사들보다 아래인 달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차례로 인간의 육체, 동물, 식물, 광물, 무생물의 원소, 아홉 단계의 악마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지구의 중심인 지옥에 마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사슬이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위계에 더 가깝다. 위에 있을수록 선하고 우월한 것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악하고 열등한 것이다. 선형적 위계의 개념은 곧 사회적 계층으로 확장되었고, 계급을 정당화했으며, 인종 사이의 우월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 문화,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22세의 다윈은 1831년 비글호에 탑승하여 27세이던 1836년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다윈은 28살 경인 1837년에 종의 변이라는 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838년 9월에 맬서스를 읽은 뒤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윈은 멜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생물들은 생존할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다윈은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경쟁이 발생하며, 주어진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개체 혹은 변이가 더 잘 생존하고 후손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다윈은 월리스가 자신과 같은 이론을 발견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윈이 이 이론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1858년이었고, 종의 기원이 발간된 것은 1859년으로 다윈이 자연선택의 개념을 발견한 뒤 20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그가 종의 기원을 출간한 계기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자신과 같은 이론을 발견한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빼앗기게 될까 봐 서둘러 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다윈은 1858년 6월 18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월리스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제 생각이 선생님께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되기를 바라며,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월리스의 이론이 자신의 이론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용한 용어 뿐만 아니라 장의 제목까지도 비슷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윈은 친구이자 저명한 지질학자였던 라이엘에게 편지를 써 “심지어 월리스가 사용한 용어는 내 책의 서두에 나오는 것들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1858년 6월 18일 다윈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편지를 받고 갑자기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왜 다윈은 인류과학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이론 중의 하나인 자연선택설을 발견하고도 20년이나 망설였던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다윈이 살았던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는 종교적 규약과 사회적 질서, 개인의 품위와 예절 바른 행동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산업혁명과 식민지, 제국주의의 결합으로 영국의 부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팽창했으며, 동시에 개인의 욕망은 극단적으로 통제하는 매우 보수적인 문화가 형성됐다. 빈부의 격차와 그로 인한 계층 분리가 발생했고, 부유층이 자신들을 빈곤층과 차별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또한 그들이 보기에 빈곤하고 문명화되지 않은 식민지인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금욕과 자기 절제가 자신들과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자신들이 우월하고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은 내키는 대로 사는 욕망의 노예가 아님을 피력했다. 


다윈은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 살았으며 부유한 남성이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특권을 가진 만큼 지켜야 할 규약들도 많았을 것이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의 우월함에 대한 의심을 해본 적이 없으며, 그 우월함에 대해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자연선택설이 얼마나 큰 모욕이 될지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에게 자연선택설을 이해시키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임을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일부러 이해하기 어렵게 썼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한다. 뉴턴도 웬만한 사람은 자신을 이론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선택설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선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생명체가 보이는 매우 국지적인 대응에 가깝다. 그런 자연선택을 주동력으로 하는 진화에는 당연히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목전의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적응할 뿐이므로 진화에 있어서 완성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진화의 끝은 완벽한 생명체의 탄생이 아니다. 진화의 흐름 속에서 다음 단계는 이전 단계에 비해 진보한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으며, 다만 주어진 환경에 조금 더 잘 적응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논리는 당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상황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었다.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자신들이 가장 진보된 형태로 설계되었다고 믿었다. 혹 인간이 점진적 진화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더 진화된 형태라고 믿고 있었고, 흑인들이나 식민지인들은 진화의 사다리에서 더 열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여겼다. 그들에게는 진화와 진보는 같은 개념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다윈이 그 질서 전체를 흔든 것이다.


다윈이 월리스로부터 자극을 받아서이든 그렇지 않든 종의 기원을 발표한 것은 위대한 일이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자면 더 그렇다. 다윈은 자신이 발표할 이론의 파급효과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20년이나 이론의 발표를 미룰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예의와 형식, 윤리와 도덕, 절제와 금욕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빅토리아 시대에 자연선택설을 발표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실수를 할 경우 권위 있는 인물들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렇게 되면 다윈의 평판은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그는 자신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월리스가 자신과 같은 이론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얼마나 초조했을까. 그는 “내 이론의 독창성이 완전히 무너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어서 출간을 해야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에 살았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다윈은 월리스의 이론을 훔친 것이라는 오해는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내 책을 모두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비열한 인간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저명한 학자였던 라이엘과 후커의 지원을 받아 린네 학회에서 진화론을 발표하기로 한다. 그때 월리스는 말레이 군도의 뉴기니에서 극락조를 찾고 있었다. 

 

 

다윈과 그의 동료들은 린네학회에서 다윈의 이론을 먼저 읽고, 월리스의 이론을 나중에 읽었다.

1858년 7월 1일 당시 가장 권위있는 생물학자 협회인 린네협회에서 진화론이 발표되었다. 다윈의 동료들은 다윈과 월리스 중 누구를 자연선택설의 창시자로 할지 정해야만 했다. 월리스는 여전히 말레이 군도에 있었다. 라이엘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각자 독자적으로 지구 상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독특한 종의 출현과 영속을 설명하는 매우 독창적인 이론을 동시에 정립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종의 기원이라는 중요한 연구에 있어서 공평하게 독창적인 학자임을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라이엘은 1844년 다윈이 집필한 에세이 초록과 1857년 미국의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의 요약문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월리스의 논문은 나중에 읽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월리스는 나중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다윈 선생님이 자신의 이론을 읽어보고, 후커 박사와 라이엘 경에게 보냈는데 그들이 이것을 높게 평가해 린네 학회에 보고했다”고 이야기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윈이 진화에 대해 오랜 기간 고민하고 연구해온 깊이 있는 학자이니 다윈이 진화론의 선구자라고 치켜세웠으며, 자신이 쓴 책에는 다윈주의라는 제목을 붙이고 자신이 쓴 여행기인 “말레이 제도”를 다윈에게 헌정할 정도로 다윈을 존경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지 170년가량이 지났고, 진화론은 그 오랜 시간 동안의 테스트를 이겨내며 생명의 출현에 대해 설명하는 가장 과학적인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를 살던 다윈의 망설임과 그의 천재성 사이의 갈등, 그리고 월리스의 등장으로 인한 다윈의 또 다른 갈등은 과학이 사회 문화적 맥락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만약 월리스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다윈은 진화론을 발표했을까? 아마 다윈의 사후에 발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윈은 서른다섯 살이던 1844년에 아내인 에마에게 자연선택설에 관한 230페이지짜리 초고와 이를 출판할 지침서를 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출판을 해달라는 부탁이자 지시였을 것이다. 그는 1882년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만약 월리스가 없었다면 진화론은 세상에 25년 정도 늦게 발표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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