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환자도 질병 연구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 환자도 과학자이다 | 의학 연구의 민주화

RayShines 2023. 2. 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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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연구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실제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의견과 환자들이 수합한 데이터가 실제 연구에 반영되어야 하며, 실제 환자들도 전문가이자 과학자와 동등한 연구 파트너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기기관은 1712년 토머스 뉴커먼에 의해 발명되었고, 1760년대에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개선되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증기기관이 제임스 와트에 의해 발명되었고, 증기기관에 의해 산업혁명이 발생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증기기관이 과학 애호가 - 영어로는 hobby scientist, 혹은 garage scientist라고 부릅니다 - 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증기기관과 유사한 형태의 기구의 도면을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이미 3000년 전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이올리스의 공 Aeolipile 이라고 합니다.

 

aeolipile
헤론의 아이올리스의 공입니다.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2014)

 

 

모든 유용한 기술들이 학계의 연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테렌스 킬리 Terence Kealey 는 저서 <과학 연구의 경제 법칙 The Economic Laws of Scientific Research>에서 기술은 반드시 학술적인 과학에서 비롯된다는 선형 모델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선형 모델은 학계의 연구가 기술로 이어지고, 그리고 기술이 현실에서 실행된다는 모델입니다. 하지만 킬리는 기술의 발견과 그 현실적 구현의 시작이 반드시 학구적인 것에서 시작되어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헤론은 이미 3000년 전에 증기기관의 작동 원리를 이용한 아이올리스의 공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헤론의 아이올리스의 공이 대학교의 연구 결과가 집대성된 뒤 그것이 과학이 되고 기술로 구현화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 킬리의 주장이며, 같은 논리로 산업혁명 역시 학계로부터 정제된 뒤 추출된 과학이 응용과학 및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농축된 뒤 기술을 통해 현실화된 것이 아니라 직접 도구와 기술을 만드는 기술자 혹은 과학 애호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사실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는 관점은 산업혁명에 선행한 16세기의 과학혁명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나 정말 과학혁명이 산업혁명의 추동력이 되는 기술들과 직접적 연관관계를 가진다는 증거는 없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에 사용된 기술, 즉 증기기관은 중국에서도 잘 알려진 것이다고 하는데 굳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유는 증기기관의 연료로 사용될 석탄이 런던 근교에 매우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리고 킬리는 증기기관이 전문적 과학 교육을 받지 않고 집 뒤뜰에서 눈앞에 놓인 기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딱딱한 과학 지식이 아니라 상식과 직관을 응용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과학 애호가의 스펙트럼의 한 극단에는 유사 과학자 - Hermit Scientist - 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Hermit은 은둔자라는 의미이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은둔 과학자라는 표현에 더 가깝습니다. 이 말은 1950년 칼럼니스트인 마틴 가드너가 처음으로 쓴 용어로 가드너는 이들에 대해 “은둔 과학자란 홀로 연구하며 주류 과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NASA의 천체물리학자들도 발견하지 못한 소행성을 자기 집 차고에서 자기가 만든 망원경으로 발견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옵니다. 아마 이들이 garage scientist들이겠지요. 당연히 NASA는 이들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옳다는 결론이 나는 시나리오를 더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의학 연구자들도 병에 대해서 연구하지만, 환자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병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과학애호가이든 아니면 피해사고에 빠져 있는 은둔 과학자이든 세상에는 나름의 방식으로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도구 덕분에 지식을 공유하고 비록 과학자들은 아닐지라도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포럼에서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나 도구에 대해서 일종의 동료 평가(peer review)를 받을 수 있는 플랫폼도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성질환이나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도 자신들의 병에 대해서 기록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며, 같은 문제를 가진 이들과 의견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또한 환자들은 자신들만큼 자신들이 앓고 있는, 혹은 앓았던 병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 자신들을 병에 대한 연구에 포함시켜 주길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유사 과학자나 과학 애호가들과 가장 큰 차이일 것 같습니다. 유사 과학자나 과학 애호가들에게는 과학이 말 그대로 취미에 가까우며 즐거움을 위해 하는 활동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 병에 걸린 환자는 없을 것이니 환자들은 자신이나 가족들의 병에 대해서 연구할 때 그것은 즐거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삶의 질, 그리고 더 나아가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절박하며 더 적극적으로 답을 찾길 원합니다.

 

의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매우 정형화되어 있으며, 그 절차가 매우 엄격합니다. 과학자들은 같은 결과가 재연되는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함으로써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합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를 객관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해석 과정 중 개인적, 정치적, 사회적 편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애씁니다. 과학자들은 모름지기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믿음, 즉 value-free science의 중요성에 대해서 집착합니다.

 

하지만 의학, 또는 의료 현장에서 정보의 비대칭성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생명과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를 환자보다 의사가 많이 보유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은 환자들의 불만뿐만 아니라 의사에 대한 불신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은 그로 인한 불이익이 발생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롱 코로나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 3700명가량이 모여서 의료진이 간과했던 여러 가지 증상들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제출했으며, 그리고 이제는 brain fog, 인지기능저하와 같은 증상들 역시 코로나의 주요 증상 중의 하나임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집단의 리더인 리사 맥코켈 Lisa McCorkell은 이제 전문지식의 문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환자들이 의학 연구에 더 깊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병을 연구하는 의학자나 병을 치료하는 의사들 중 자신이 치료하는 병을 실제로 앓고 있는 비율이 그다지 높진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 병이 희귀한 질환이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개인적인 경험을 치료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의학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대규모, 장기간의 검증에서 충분한 증거가 확보된 치료법을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치료의 원칙이며, 검증되지 않은 치료를 환자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자들이 보기에는 의사들은 병에 대해서 자신만큼도 모르고, 실제로 겪어 보지 않고 책으로 배운 지식만을 갖고 있는 의사를 자신의 치료를 맡길 만큼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환자가 질병 연구와 치료법 개발 과정에 깊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가 연구와 치료에 깊이 개입하는 것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의견도 분명히 있습니다. 일단 환자들과 환자의 가족들, 특히 부모님들은 객관적 데이터가 비관적으로 나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과학의 대전제는 무지를 인정하고, 실패를 받아들이고, 언제든 내가 세운 가설을 폐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병과는 실질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과학자들과 병의 한가운데에서 고통받고 있는 환자나 가족들과는 실패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다를 것입니다. 즉 데이터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상황에서 데이터에 자신의 바람을 투영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 연구에 있어서 가해지는 다양한 규제들이나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환자나 보호자들이 속속들이 알고 있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또한 매우 복잡한 문제에 있어 자격을 갖고 훈련을 거친 전문인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과학사학자인 브루노 스트라서 Bruno Strasser 는 비행기가 와류에 휘말렸을 때 승객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럴 때는 파일럿을 믿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의미이겠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과학적 소통의 대부분을 차지해 왔던 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파일럿을 믿도록 설득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의학 연구의 민주화라고 표현합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대중들의 의견이 충분히 수렴되고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방향이 옳으냐 그르냐를 결정짓고자 쓰는 글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갈수록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데이터가 축적되는 속도, 지식이 팽창해 나가는 속도는 한 인간이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닙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도 최신의 지식들을 모두 습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한 보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안전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한다면 의식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지식을 먼저 찾게 될 것입니다. 동료 평가를 적절히 거치지 않은 지식을 덥석 받아들이는 과학자나 의사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기까지 복잡다단한 단계를 거치며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하루가 급한 환자나 보호자들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아탑 위의 공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겠다는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오랜 시간 종교와 철학의 공격을 버텨낸 과학의 연구 방식 관계를 한 번에 깨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고 부작용도 따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학, 의료는 미래에 어떤 모습일까요. 

참고자료 : wsj, 안티프래질(나심 탈레브),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로버트 B. 마르크스), 스켑틱(마이클 셔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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