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오늘만 살았던 남자 헨리 몰레이슨 Henry Molaison | HM | H. M. | 해마 | 브렌다 밀너 Brenda Milner

RayShines 2023. 8. 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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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M. 이라는 약자로 알려졌었던 헨리 몰레이슨 Henry Molaison 은 양측 해마를 수술적으로 제거한 뒤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아마도 헨리 몰레이슨은 피니어스 게이지 Phineas Gage 와 더불어 정신과학이나 신경과학, 혹은 심리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피니어스 게이지는 폭발 사고로 인해 쇠막대기가 얼굴을 관통하며 전두엽의 상당 부분이 사라져 버린 인물로 유명합니다. 현대에 출간된 심리학 입문서의 3분의 2 이상이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례를 소개하며 전두엽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하니 그가 학계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해마가 기억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논의될 때 헨리 몰레이슨은 빠질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헨리 몰레이슨은 피니어스 게이지만큼 널리 알려져 있진 않은 것 같습니다만 기억의 형성과 그에 있어 해마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벌어질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사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헨리 덕분에 해마의 역할에 대한 실증적 증거가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 사고 후 헨리는 반복적으로 발작을 하게 됩니다.

1926년에 태어난 헨리는 아홉 살인 1935년에 자전거를 타다 떨어지며 두개골이 골절될 정도로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다친 후 치료를 받기는 했으나 그의 뇌에는 큰 흉터가 남았습니다. 우리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인 뉴런들은 기본적으로 전기 화학적 신호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합니다. 따라서 매우 약하긴 하지만 뇌에는 계속적으로 전기가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저항은 낮고 절연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뉴런은 그런 기능에 특화된 세포입니다. 그런데 흉터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흉터 조직은 신호는 차단하는 대신 전기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가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한꺼번에 터져 나오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 결과 헨리는 반복적으로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간질, 즉 뇌전증에 걸린 것이지요. 그런데 발작 증상이 너무 심해 다니고 있던 공장 일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으며 약도 거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일한 해결책은 수술을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측두엽을 적출하는 수술을 받게 됩니다.

미국의 외과의사였던 윌리엄 스코빌은 1950년대 초까지 300여 명의 중증 조현병 환자들에게 뇌엽절리술을 시행한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가 하던 수술은 뇌전증 환자들에 대해서는 임상 경험이나 데이터가 거의 쌓여있지 않았으며, 사실 당시 뇌전증 환자에게는 헨리에게 시행된 정도로 공격적인 수준의 수술적 중재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코빌은 조현병 환자에게 하던 수술법을 그대로 헨리에게도 시행합니다. 1953년 그는 헨리의 양쪽 눈 위 두개골에 2.5cm의 크기의 구멍을 내고 양쪽 뇌반구에서 8cm 정도의 뇌를 파냈습니다. 제거된 부분에는 양측 해마의 대부분과 편도, 그리고 내후각 피질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수술의 목적만 두고 본다면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헨리는 회복하기 시작했고 발작의 빈도는 감소했습니다.
 
 
 

수술 이후 그는 새로운 기억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헨리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수술을 받은 이후 그는 새로운 기억을 전혀 생성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1953년에 멈춰 있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의 다른 인지적 능력은 대부분 정상 범주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과 수술을 받기 전 1~3년 정도의 기억은 모두 제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 죽기 전까지는 남은 일생 내내 새로운 기억을 전혀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가 보유할 수 있는 기억은 고작 한 시간 남짓이었으며, 그는 영원히 현재만을 살았습니다.  그는 매 순간이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듯했고, “내가 어떤 즐거운 일을 겪었든, 어떤 슬픈 일을 겪었든 매일매일이 그저 그때뿐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헨리는 또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만, 냄새들을 구별하진 못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해마, 편도와 더불어 내후각 피질까지 절제되어서 그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을 50년 간 연구했던 브렌다 밀너를 그는 단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늘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를 했죠.

임상 신경학자였던 브렌다 밀너 Brenda Milner 는 당시 해마와 일화기억 형성 능력의 연결 고리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헨리 외에도 D. C., M. B. 라는 뇌엽절리술을 받은 다른 두 환자의 사례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둘은 헨리와 마찬가지로 수술 이후 일어난 어떤 일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밀너는 2008년 헨리가 사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그를 만나며 연구했지만, 헨리는 그녀를 단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헨리는 만날 때마다 늘 유쾌하게 연구에 참여했다고 하며, 한쪽만 한쪽을 기억하고 다른 한쪽은 상대방을 늘 처음 만나는 기묘하고도 일방적인 관계가 50년 간 지속됐습니다. 실제로 헨리가 사망한 뒤 밀너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헨리의 뇌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운동을 학습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1986년 고관절 치환술을 받고 보행보조기를 사용해야만 했는데, 보행보조기 사용법을 별 무리 없이 익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밀너가 그에게 따라 그리기를 가르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해마가 절차기억, 즉 근육기억을 형성하는 데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해마는 우리의 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저장되기 전 거쳐가는 곳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해마에 임시적으로 저장된 뒤 피질 전체에 흩뿌려집니다. 해마는 이른바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 이 매우 높습니다. 이 말은 새로운 신경 연결, 즉 시냅스 synapse 를 형성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해마는 용량이 그렇게 큰 기관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해마에 있는 뉴런의 숫자는 유한하므로 모든 기억을 보유할 수는 없습니다. 물리적 한계에 금방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피질, 그러니까 우리의 뇌 전체는 이에 비해 광활합니다. 용량이 크므로 상대적으로 기억을 저장할 곳도 많습니다. 그리고 해마의 뉴런들에 피해 피질의 뉴런들은 가소성이 낮습니다. 다시 말해 한 번 기억이 형성되면 해마의 기억들처럼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이 형성되는 데에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으나, 변화나 파손에 대한 저항성도 더 높습니다. 그래서 일단 해마를 거쳐 장기기억으로 저장된 정보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해마를 잃어버린 헨리는 1분 전의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지만, 피질에 저장된 장기기억들은 온전히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있었습니다.
 
 
 

떠올릴 추억이 없다면 어떨까요?

헨리가 2008년 사망하며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아마도 연구 대상의 사생활에 대한 보호 때문에 그전에는 H. M.이라는 약자로만 불렸던 것 같습니다. 어떤 영화에 나왔던 “난 오늘만 산다”는 주인공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정말 현재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삶의 어땠는지 우리는 헨리의 삶을 보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우리인 것은 각자가 쌓아온 기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를 살며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머릿속에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의 감각이 디폴트값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선적으로 현재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헨리에게 미래는 없었으며, 과거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스물일곱 살 이전의 기억뿐이었으며, 82세에 사망할 때까지 55년 간 그는 아무런 추억도 쌓지 못했습니다. 추억이 없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공허했을까요,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그저 매일매일이 그때뿐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참 슬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가족들과 보낸 시간들, 친구들과 나눈 대화들, 내가 개인적으로 성취한 것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고양하고 위로하며 따뜻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재료가 전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참고 문헌 : 건강의 뇌과학(제임스 굿윈),  기억의 뇌과학(리사 제노바), 오래된 기억들의 방(베로니카 오킨), 뇌과학의 모든 역사(매큐 코브),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한나 모니어), 습관의 알고리즘(러셀 폴드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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