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우리는 빈 서판일까요, 운명의 노예일까요 | Blank Slate | Tabula Rasa | Nature vs. Nurture | 본성 대 양육 | 핵심 지식 Core Knowledge

RayShines 2023. 10. 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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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빈 서판으로 태어날까요? 아니면 인간은 모든 것이 결정된 채로 태어날까요? 아니면 그 중간 어디 즈음일까요?

 

 

 

Tabula rasa라는 말이 있습니다.

Tabula라는 것은 태블릿 tablet, 즉 판입니다. Rasa라는 말은 지워지다 scraped, erased 는 뜻입니다. 즉 Tabula rasa 는 영어 표현으로 바꾸면 scraped plate, erased tablet, 더 흔한 표현으로는 빈 서판 blank slate 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본성 따위는 없으며, 삶에서 얻는 경험을 통해 한 인간이 형성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빈 서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스티븐 핑커는 아주 두꺼운 책을 한 권 써내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아니면 인간이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되느냐 하는 것은 늘 첨예한 주제였습니다.

 

 

 

아마도 인간이 빈 서판이라는 주장을 처음 펼친 것은 존 로크였을 것입니다.

존 로크는 17세기 인물로 <교육에 관한 성찰>이라는 1693년에 발간된 저작에서 “아이는 흰 종이나 밀랍처럼 깨끗하여, 어떤 형태로든 빚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이론을 tabula rasa, 빈 서판 이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존 로크는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 존 로크 이전,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 인간은 주어진 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당시에는 거대한 존재의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각 존재들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계급에 따라 살아야 하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 위계를 거스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본성이나 운명에 대한 반작용을 만들기 충분했고, 그것을 존 로크가 빈 서판이라는 관념으로 빚어냈을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18세기의 인물입니다.

1750년 경 “과학과 예술의 부활이 윤리 도덕의 발전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논문 공모에서 그는 모든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다른 학자들은 대부분 과학과 예술을 주제로 논문을 썼는데, 유독 루소만이 “과학과 예술보다 자연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 논문으로 그는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여기서 고상한 야만인 noble savage 라는 개념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말은 1670년 영국 시인 존 드라이든이 “나는 자연이 빚어낸 최초의 인간처럼 자유롭다 / 고상한 야만인이 거친 숲 속을 뛰어다니던 때처럼. I am as free as nature first made man, Ere the base laws of servitude began, When wild in woods the noble savage ran.”이라고 표현한 데서 처음 나왔습니다. 이 말을 루소가 차용했던 것입니다. 문헌에 따라서는 드라이든이 아니라 시인 마르코 레스카르보 Marc Lescarbot 가 1606~1607년 사이에 동캐나다의 미크맥 인디언과 함께 살며 했던 경험에서 고상한 야만인이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레스카르보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살아가던 미크맥 인디언들은 법은 없었지만 서로를 공격하지 말라는 대자연의 가르침이 있었으며, 그래서 싸우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는 기록을 남겼고 이것이 19세기 영국에서 유명해졌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루소는 “야만인의 어리석음과 문명인의 사악함의 정중앙에 위치한 원시 상태의 인간만큼 고상한 존재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근심 없이 평화로운데,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했습니다.

 

 

 

행동주의자 존 B. 왓슨은 빈 서판 이론의 절대성을 천명합니다.

인간에게 본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으며 어떤 경험을 쌓아나가느냐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또 무엇도 될 수도 없다는 주장은 행동주의의 창시자인 존 B. 왓슨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나에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이를 주면, 개인의 재능, 기호, 능력, 소질, 조상들의 경력과 무관하게 내가 선택한 유형의 사람 - 의사, 변호사, 상인, 거지, 도둑으로 길러낼 수 있다.” 아주 오래된 육성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가 떠오르는 장면이지요. 왓슨은 인간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인간에게 본성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욱 강해졌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은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특히 우생학과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나치에 대한 반작용은 인간 본성을 부정하는 이들의 도덕성에 불을 붙였습니다. 우생학을 과학이라고 인정하는 학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사를 해보면 인종이라는 말로 포장된 집단들의 차이는 그 주요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 간의 차이보다 적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인, 흑인, 황인 간의 차이는 백인들 간의 차이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이런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고 과학적인 수치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 있지만, 나치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치가 남긴 정신적 상흔은 우리 모두가 차이가 없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 텅 빈 채로 태어난다는 주장으로 전개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본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인종 간의 차이도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인정하면 교육의 의미가 퇴색되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것은 근대적 진보적 교육의 의미를 증발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의 교육 대부분은 고상한 야만인과 빈 서판 이론에 기초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교육을 해서 뭐 하겠습니까, 우리의 아이들은 주어진 본성대로, 결정된 운명대로 살아갈 텐데 말입니다. 대치동에 있는 모든 학원들은 전부 문을 닫아야겠죠. 이런 개념은 아이들에게 어떤 골든 타임이 존재해서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미래의 경로가 크게 달라진다는 믿음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큰 비즈니스가 되기도 했었죠.

 

 

 

빈 서판 이론에 대한 첫 번째 명시적 공격을 가한 이는 데스먼드 모리스였습니다.

<털 없는 원숭이 The Naked Ape>에서 그는 빈 서판이라는 다윈 이전의 개념에 반대했습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1859년 처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존 로크가 1704년 사망했고, 장 자크 루소가 1778년에 사망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빈 서판과 고상한 야만인 이론이 다윈보다 100년도 먼저 나온 이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윈은 유전자나 DNA의 개념은 모르긴 했습니다. 그는 정자와 난자가 몸 전체에서 정보를 받아 서로 뒤섞은 뒤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고 가정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말 자체가 인간이 완전히 공란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DNA를 인정하면 빈 서판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용감하게 포문을 연 데스먼드 모리스 덕에 인간에게 본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논의가 가능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에드워드 윌슨,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도킨스 등 진화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본성이냐 자연이냐 Nature vs. Nurture 에 대한 논쟁은 치열했습니다. 시냅스를 두고 전기 신호냐 화학신호냐를 두고 싸웠던 Soup vs. Spark 논쟁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논쟁이 너무나 첨예하다는 것은 둘 다 옳을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두 경우 모두 두 가지고 모두 섞여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기대 위반 violation of expectancy, 핵심 지식 Core Knowledge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기대를 벗어난다는 것을 거창하게 한 말이지요. 마술을 볼 때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태양부터 모래알까지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뉴턴의 힘이 위배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리법칙이나 마술이라는 것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아기들도 어른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식탁 위의 컵이 갑자기 천장에 달라붙으면 중력에 대해서 모르는 아이들도 그 잔을 쳐다봅니다. 또한 아기들은 어떤 단단한 물체가 다른 단단한 물체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냥 알고 있습니다.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 규칙은 앞으로 아이가 살아나가며 마주칠 모든 사물, 사건들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핵심 지식 core knowledge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빈 서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방금 출시된 스마트폰에도 미리 인스톨되어 있는 앱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팩토리 리셋하더라도 기본 앱들이 깔린 채로 재구동되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갖고 태어난, 다시 말해 미리 배선된 회로가 존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역시 학습을 가능하도록 하는 회로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완전히 빈 서판이라면 뭔가를 배울 수조차 없을 것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기판이 특정한 조건이 되어야 켜지며 작동을 시작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암 소인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무조건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생활을 잘 관리하면 위험성이 분명히 낮아집니다.

 

 

 

그러나 운명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의 결정과 무관하게 내가 갖고 태어난 것들로 인해 절망할 필요는 없으며, 운명이라는 말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내가 유리하게 타고난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며 노력을 폄하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갖고 태어난 자원과 쌓아나가는 경험의 산물입니다.

 

참고 문헌 : 빈 서판(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착한 천사(스티븐 핑커), 지식인의 두 얼굴(폴 존슨), 스켑틱(마이클 셔머),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리처드 랭엄),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마이클 셔며), 차이에 관한 생각(프란스 드 발), 뇌로부터의 자유(마이클 가자니가), 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브루스 후드), 오래된 기억들의 방(베로니카 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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