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부모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요? | 양육 교육 환경의 중요성 | 유전자의 중요성 | 본성 대 양육 | Nature vs. Nurture

RayShines 2024. 1.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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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양육의 역할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각각의 아이들이 타고난 부분에 대해서 고려를 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교육과 훈육에 의해 모두 무한히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추상적 요소에 있어서 환경과 유전자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은 이제 너무 낡은 것이고, 어느 누구도 둘 중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가 서로 섞이고 어우러지며 한 개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형성과 발달에 기여합니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함께 자란 형제는 태어나서 헤어진 형제보다 더 비슷하지 않습니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함께 자란 형제는 태어나서 헤어진 형제보다 더 비슷하지 않다. 입양된 형제들도 낯선 사람들보다 더 비슷하지 않다.” 처음 이 부분을 읽으면 충격적이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합니다. 이 문장은 부모가 한 사람의 인생 경과에 미치는 영향이 없을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정말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함께 자란 형제는 따로 자란 형제보다 더 비슷해야 합니다. DNA를 공유하지 않지만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입양된 형제와 자매는 환경과 유전자 모두를 전혀 공유하지 않은 완전한 타인보다 더 비슷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제공하는 양육 방식이나 환경이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적인 형질을 발현시킬 정도로 강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환경으로는 한 개인을 구성하는 유전자의 힘을 전복시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양육이나 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기도 할 것입니다.

 

 

 

또래의 영향력이 부모의 영향력보다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장 중인 아이들에게 부모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인자는 무엇일까요. 외국의 경우 억양을 가지고 이 문제를 많이 연구합니다. 억양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거의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부모가 아니라 또래들과 억양이 비슷하다고 하네요. 따라서 어떤 부문의 경우 부모보다 또래의 영향력이 더 큽니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흡연, 위법 행위, 범죄 등에 있어서는 압도적으로 또래의 영향이 더 큽니다. 부모는 여기서 별 힘을 쓰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주 흔히 하는 말이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더냐는 것이지요.

버릇없이 행동하거나, 예의가 없거나, 혹은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들을 보고 우리들이 쉽게 하는 말이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냐”는 비난입니다. 우리는 아직 법적 성인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양육을 걸고 넘어집니다. 여기서 그 사람의 DNA을 1차적 문제 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유전자야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서열을 모두 파악한다고 해도 그것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규명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개인보다 가문을 더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의 집산주의적 문화도 이런 사고방식에 한몫을 합니다. 누군가가 저지르는 잘잘못은 그 집안의 교육 방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청소년의 비행에 있어 부모의 지도력보다 또래 집단 내에서의 지위 획득이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비행청소년의 발달에 있어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아이들을 그런 환경에서 자라도록 놔두고, 나쁜 친구들이 있어도 차단하지 못한 부모의 탓일까요. 아니면 그런 환경 자체가 만들어지도록 방치한 사회의 책임일까요.

 

 

 

모든 인간이 빈 서판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완전한 빈 서판이어서 양육, 훈육, 교육, 훈련, 연습 등에 따라 유전자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한 채 성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누구든 원하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모든 연령의 모든 개인에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 경험적인 법칙이라는 것 또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잠재력이 인간의 전생애에 걸쳐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인간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 - 골든 타임 - 가 있고 이 시기를 놓치면 그 인간의 잠재력의 샘이 말라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각은 모든 인간이 동질하기 때문에 기회의 평등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이 명제는 양육과 교육의 중요성, 아이의 뇌가 굳어지기 전에 적절한 경험과 자극이 필요하다는 명령으로 연결되며 엄청난 규모의 교육산업을 낳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빈 서판이라면 우리에게 벌어졌던 모든 일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한 청소년의 현재 모습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 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의 자녀에게 벌어진 이들에 부모는 100%의 기여분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학업 성취도가 높지 않은 아이들은 그저 부모의 탓을 하며 화를 내면 되는 것일까요? 어린 나이에 재능을 발견해서 꽃피운 아이들은 재능을 만들어준 부모에게 감사를 하고, 그 부모는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피조물인 아이를 자랑스러워하면 되는 것일까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고, 자녀가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을 텐데 엇나가는 자녀가 모두 부모의 탓이라고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부모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몇 살까지 미치는 것일까요? 18세 11개월령과 19세 1개월령의 연령 차이는 2개월이지만 법적으로 한쪽은 미성년자이고 한쪽은 성인입니다. 법적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동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때부터는 양육의 영향력은 갑작스레 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나쁜 일이 일어나도 좋은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몫입니다.

 

 

 

양육에 과한 권능을 부여하는 태도, 그리고 모든 것을 양육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양날의 검입니다.

이런 태도는 한 인간이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개인의 불행을 모두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좋은 핑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게 몇 살 때부터 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성인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의 현재 모습에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은 본인일지 모릅니다. 나에게 벌어진 안 좋은 일에 대해 비난할 대상을 찾고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여기고 싶은 마음은 들 수 있겠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래의 내 모습에도 나 자신은 기여할 것이 없고 모두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이 됩니다. 지금의 내 모습에는 당연히 부모가 내려준 유전자, 부모가 제공한 양육, 그리고 내가 놓여졌던 환경과 친구, 그리고 나 자신의 결정이 모두 함께 기여합니다. 어느 것이 가장 강력했는지는 정말 알기 어렵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미래의 모습에 무엇이 기여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고 문헌 : 빈 서판(스티븐 핑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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