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일까요, 악한 존재일까요.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은 인간이 선택적으로 선하고, 선택적으로 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이 인간을 더 잘 설명하는가는 아마도 풀리지 않는 난제입니다.
생명을 설명하는 두 가지 서로 배치되는 극단적 설명들의 논쟁이 끝나지 않는 경우에는 늘 결론이 둘 다 맞다, 혹은 그 둘 중 사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성과 양육이 그랬고, 시냅스 신호가 전기적인지 화학적인지에 대한 논쟁도 그랬습니다. 생명과 그 작동방식은 무엇 한 가지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해서 그런가 봅니다. 같은 견지에서 인간이 선하게 태어나느냐, 아니면 악하게 태어나느냐, 아니면 그냥 텅 빈 백지상태로 태어나느냐에 대해서도 첨예한 대립이 있어 왔습니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매우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미 너무나 고도로 복잡화되었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인간이 놓인 상황이나 자라온 사회 문화적 환경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피실험자들을 실험실로 데리고 와서 실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진화적으로 인간의 근연에 있다고 생각되는 두 종의 유인원, 즉 침팬지와 보노보를 연구합니다. 이들 각각이 놓인 환경은 인간 개인이 놓인 환경만큼 다양하지 않습니다. 이 둘은 비교적 한정된 서식지에서 살고 있고, 사회나 종교로 인한 사람만큼 크게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연구하면 그들과 공통 선조를 가지고 있으며, 수백만 년 전에 유전적으로 분기된 인간의 본성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둘의 성정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에 있습니다. 침팬지는 매우 부계 중심의 사회이며 공격적입니다. 반면 보노보는 모계 중심의 사회이며 침팬지에 비하면 폭력이 없다고 봐야 할 정도로 평화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 인간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우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침팬지 측을 옹호하는 학자들도 있고, 보노보가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도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화적인 변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과학에만 한정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정치관도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원래 선하다고 본다면 엄혹한 법률이나 사회적 규제의 필요성은 높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절대다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모두가 평등한 관계를 설정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갈등이 있어도 늘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미래를 부정적으로 봐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원래 악하다고 본다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며, 약자에 대한 착취가 만연할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에 강력한 규제와 통제가 필요하다고 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강력한 권력을 쥐고 누군가를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에 계급이 생기는 것 역시 당연하며, 개개인이 아니라 국가 간에도 이런 구도가 형성되며 전쟁 역시 불가피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인간이 모여서 구성한 사회나 국가를 운영하는 철학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가지는 정치관에는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녹아들어 있다고 봐야만 합니다.
결국 인간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는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봐야 합니다. 인간이 타고나기를 이타적인 존재인 동시에 평화와 화합을 추구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인간에게 존재하는 동물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을 각 개개인은 완전히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제도적인 압력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더 중요한 영역의 문제인 것이지요.
한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표적인 악인으로 보고 있는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였고 자신의 반려견을 매우 사랑하는 동물애호가였습니다.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로 수많은 생명을 학살한 폴 포트는 지인들에게는 매우 친절한 프랑스 역사 선생님이었다고 합니다. 역시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스탈린 역시 수감 생활 동안 욕 한 번 한 일이 없는 모범수였다고 합니다. 한 개인 내에서도 선과 악의 판단이 어려운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런 개인 수십억 명이 모여있는 인류라는 집단의 선과 악을 판가름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선택적으로 선할 수 있고, 선택적으로 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양쪽 모두에 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악한이라도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울 수 있습니다.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신사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는 악인일 수 있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만, 평범함 우리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극단적 형태의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보다, 상식적 수준과 범위 내에서 자신이나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의 일탈 행위를 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아마도 그나마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가 선행과 악행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가 선행과 악행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을 가능성이 꽤 높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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