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행복하지 않으면 의무를 유기하는 것이라 여기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행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불행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불행을 모두 없애고, 완전한 행복만을 좇는 것이 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세 유럽이나 과거 우리나라에서 한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신분과 계급이 결정되어 있던 시절에 개인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나 자격 따위는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자연의 섭리로 미화된 신분제도의 억압에 대항하지 않은 채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다가 명이 다해서 사망하면 그뿐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때도 개인들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렸을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 개인의 인생은 각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된 것에 대한 수용에 가까웠습니다. 개인이 결정할 것이 없으니 탐색할 것도 없었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관조해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어쩌면 완전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유의지가 있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고, 그것을 찾았다면 적극적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비난하는 시각도 큽니다. 왜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주어진 삶에 대한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우리를 둘러싼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온갖 것들에 완전히 포위 당해 있습니다. 최신형 스마트폰, 1초마다 업데이트되는 SNS, 끝도 없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컨텐츠, 우리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알약들, 우리가 손만 뻗으면 찰나의 행복감을 약속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이것들을 이용하면 일상의 고민들은 순식간에 멀어집니다. 아무리 힘든 하루였다고 하더라도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넷플릭스에 빠져들면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승진에 누락되어 실망스럽더라도 플레이 스테이션의 전원을 켜면 현실의 고민은 저 멀리로 사라져 버립니다. 간단한 해결책이 있으면 누구나 그걸 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커집니다. 클릭 한 번이면 걱정이 사라지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겠죠. 그리고 이런 경향은 우리가 사소한 불편감이나 일상에서 언제든 어디서든 느껴질 수 있는 평범한 불행조차도 견디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마치 호구가 되는 것처럼, 나 자신이 행복할 권리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나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 때문에 내가 불행한 거야 내가 참지만, 다른 사람이 날 불행하게 만든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삶에는 원래 너저분한 구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 생각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결정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세상이라면,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상황이 빈번한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일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누군가 나를 불행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없이 한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불행의 단초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목적과 목표가 없는 불행까지도 누군가 나를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복잡계에서 발생한 무작위 사건에 불과한 일에 의도와 의지가 있다고 여기면 피해의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겠지요. 일상에서 발생하는 평범한 불행은 그저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제 우리는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불행마저도 깡그리 제거하고, 그 위를 행복의 솜사탕으로 덮어버리려는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논란의 여지없이 불행한 사건도 분명히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졌을까 싶은 재앙들, 세상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악행들의 결과로 인해 발생한 처절하고 참담한 불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 깊이 좌절하고, 크게 낙담하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당사자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그것을 어떻게 이겨낼지, 혹은 이겨낼 수조차 없는지에 대해서 강요할 주체는 없으니까요. 만약 그것을 건강한 방식으로 이겨내고 삶을 살아나갈 힘과 용기를 되찾는다면 그것은 찬사를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그 모두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지요.
평범한 불행은 반드시 발생합니다.
반면, 사소하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불행 앞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발생할 정도로 낙담해야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삶과 인생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사소한 불행을 모두 제거하겠다며 자신의 좌절에 대한 분노를 사방에 쏟아내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며, 자신의 행복을 밝히기 위해 타인의 행복, 그중 대부분의 아주 가까운 주변인의 행복을 불쏘시개로 쓰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불행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평범한 불행이고 무엇이 비범한 불행인지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를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잃었을 때 가장 동요하는가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내가 동요하게 되는 대상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요하게 되는 수위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대상임은 누구나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발생하는 사소한 상처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친구와의 식사 자리에서 누가 100원을 더 내느냐 하는 문제로 다툰다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겠지요. 건강은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실수로 넘어져서 다친 무릎의 상처를 낫게 하겠다고 대학병원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적 불행에 대해서는 일상적으로 무던하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결국 그것이 나의 행복을 지키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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