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 토마스 아 켐피스 | 삶의 의미 | 세계관의 확장

RayShines 2024. 1. 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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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학창 시절부터 항상 저를 따라다니던 질문 중 하나가 “대체 왜 공부를 해야 하느냐”였습니다. 영어 문법, 미적분, 물리 공식, 화학식 등을 외우고 있을 때면 대체 이런 것들이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단순한 덧셈 뺄셈을 할 줄 알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살아나가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죠.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잘 받아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삶을 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며 살아갈 정도의 지식만 갖추고 있으면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요.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친구들과 놀거나 게임을 할 때, 가고 싶은 곳을 갈 때,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질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할 때 등 일상생활은 미적분이나 열역학 법칙이나 아보가드로의 수 같은 건 직접적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사인, 코사인이 뭔지 전혀 몰라도 오르막길을 오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진동수와 파장의 관계를 모른다고 해도 음악을 즐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 즉 생존과 대인관계, 번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이미 우리 안에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식이라는 형태로 학습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들은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고, 직관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잘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기 어려운 것이지요. 물론 인간이 갖고 태어난 엄청난 기술들, 걷기, 다른 사람의 마음 읽기, 손으로 세밀한 작업을 하기 등은 훨씬 더 대단한 가치를 가집니다. 인간이 따로 배우지 않아도 대부분 할 수 있는 기술들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거나 보조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비용과 에너지가 들어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미 갖고 태어난, 기본적으로 인스톨되어 있는 프로그램들이 엄청나게 세련된 동시에 비싼 것들이라는 의미이고, 추후 우리가 학습을 통해 인스톨할 지식들과 비교해서도 진화적 과정에서 유구한 시간 동안 갈고닦아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기본 앱들만 가지고서도 세상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갖기를 바랍니다.

생존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후라면 그런 욕구는 더욱더 커집니다. 누구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싶을 때 놀고, 먹고 싶을 때 원하는 것을 맘껏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궁극의 행복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다들 경제적 자유를 꿈꾸고, 건물주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아보면 금세 질립니다. 조금 바쁘게 지내면서 하루를 쪼개 소소한 즐거움을 찾던 때와는 달리 언제든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권태로 다가오지요. 그러면서 갑자기 공부란 것을 해볼까, 책이라는 것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생존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물론 하루하루 힘들게 살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인생에서 그런 시기를 지나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단계를 벗어나 뭔가 다음 단계로 도약하길 바라고 원합니다. 그런데 막상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할 때 느껴지는 막막함은 누구나 한 번 정도 경험해 보게 됩니다. 대체 나는 왜 사는 걸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돈이란 게 뭘까, 대인관계는 왜 이렇게 힘들까 등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실존이나 철학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할 수 없다면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까요.

 

반드시 뭔가를 많이 알고 책을 많이 읽어야만 답이 없어 보이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고 학위가 없는 어르신들이 삶에 대해 매우 지혜로운 답을 주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봅니다. 따라서 지식은 지혜와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지와 무식에서 비롯되는 무례와 무관용을 경험할 때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오랜 경험과 그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지혜를 얻은 일부 현명한 노인들의 사례를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반례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도 많은 우는 무지에서 비롯되니까요.

 

 

 

공부는 나의 세상을 확장시켜 줍니다.

뭔가를 공부해서 알게 되고, 지식을 체득해내가는 것은 우리가 보는 세계를 확장시켜 줄 수 있습니다. 우물 안에 갇혀 우물 크기보다 큰 하늘을 본 적이 없는 사람과 비록 일평생 작은 방에서 지낼지라도 독서를 통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세상은 다릅니다. 뭔가를 알게 되면 그것을 이해하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면 그만큼 관용도 늘어납니다. 잘 모를 때는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던 것들이지만 그것의 역사를 알게 되면 의미가 생겨나고 의미가 생겨나면 관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내 눈앞에서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나도 짜증이 나지만, 그 사람이 얼마 전 소중한 사람을 잃고 오늘은 실직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연민이 생겨나는 법이니까요. 어릴 때에는 협소한 세상에서 살도록 강요받습니다. 아직 절제하는 능력, 행동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있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필요성이 높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성인이 되어 세상을 탐험해 나갈 때 우리는 우리의 세상이 확장됨을 느낍니다. 그러나 누구나 물리적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그 외연이 무한정 확장될 수는 없습니다. 이때 세상과 우리 자신이 맞닿는 면적을 늘려줄 수 있는 것이 공부입니다.

 

독일의 수도사였던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

 

공부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주고, 우리의 세계를 넓혀주며,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하루하루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삶이 어찌 보면 가장 행복한 삶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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