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더러 찾아옵니다. 그럴 때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찾아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중 기적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조금 발췌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밤의 기적 소리만큼." 이라고 대답한다.
(…)
“(...)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한테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장소로부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리고 격리되어 있다고 느껴. (…)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혀서,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야.”
(…)
"그렇지만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먼 기적소리야. (…) 철상자는 해면을 향해서 천천히 떠올라. 그것은 모두 그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렇게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라고. 나는 그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해."
어린 시절에 이 소설을 읽고 크게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키의 단편집 중에는 염세와 희망이 공존하는 작품들이 더러 있죠.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으나 인생을 살다 보면 두꺼운 철상자에 갇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차고도 넘칩니다. 그럴 때면 참 억울하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지금까지 누군가를 해친 일도 없었고 악의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착하게 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보는 동화책의 결말이 항상 주인공들이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는 외침에 가깝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됐습니다. 욕 많이 먹는 사람들이 잘 살고 오래 산다는 것은 그들은 타인들이 자신에게 가하는 도덕적 비난이나 멸시를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며 설령 자신의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받는다고 해도 그런 것들로 스트레스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커 보이는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며 스트레스받지 않고 실리적이고 계산적인 결정을 내리며 살아가니 물질적, 사회적 성취는 이루고 심리적인 부하는 적게 느끼니 오래 살겠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중 하나가 이것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선의를 갖고 세상을 산다고 해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과한 기대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착하게 살면 날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모일테니 좋은 일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나쁜 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정도는 아닐지도 모르니까요.
그때가 언제이든 나쁜 일은 항상 생깁니다. 때로는 크게 낙담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들을 헤치고 나가야 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우리 속담에서 말하듯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을 믿고 싶지만 그것도 참 어렵습니다. 하루키도 그런 상황을 겪어봤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음 숨을 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그 두려움 속에서, 아무 빛도 보이지 않는 그 절망 속에서 어느 순간 들려오는 기적 소리, 그것이 다시 한번 나를 살아나가게 하는 힘이 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기적 소리를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웃음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옅은 미소, 차곡차곡 쌓여가는 추억들, 그런 것들이 심연에서 우리를 끄집어 올려줄 기적소리가 아닐까요. 아수라장을 헤쳐나가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희미한 기적 소리가 찾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저 또한 그런 기적 소리를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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