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인간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합니다. | 내집단과 외집단 | 추방과 파면

RayShines 2024. 4. 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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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합니다. 별 거 아닌 것으로도 우리는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우리는 그들을 그들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이라는 한자어의 뜻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기는 합니다만, 완전한 고립을 원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즉 누군가에겐가 방해받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있지만, 독방에 갇혀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자신만의 시간이란 원하지 않는 연락을 받지 않을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지, 나 자신 역시 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원하는 혼자만의 시간이란 양방향으로의 고립이 아니라, 우리 측으로 허락 없이 들어오는 정보를 차단할 권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순간조차 완전한 진공 상태에 있길 원하지는 않습니다. SNS를 확인하며 친구들이 뭘 하는지 살펴보고, 톡 목록을 스크롤하며 답장을 할 사람을 고르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OTT로 드라마를 봅니다. 이것은 고립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즐길 것을 방해 없이 즐기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 정도로 인간은 사회적입니다.

 

 

 

과거 지금처럼 인간이 사는 환경이 발달하기 전에 고립과 추방은 죽음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래서 영화 존 윅을 보면 규칙을 지키지 않은 개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 파면(excommunicado)이며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면 스캐어크로우에게 내려지는 처벌이 추방(exile)입니다. 과거 중소규모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던 인간은 추방당하거나 고립되면 생존 가능성이 0에 수렴했습니다. 죽음 그 자체보다 두려운 것이 추방이었고, 이는 인간들이 사회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게끔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사회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개발된 인간들의 무리는 추방이라는 형벌을 고안해냈겠지요.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집단을 만들고, 집단에 속하고자 하며, 집단 내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집단 내에 머무르기 위해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무슨 일이든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보다 집단의 규율을 저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체를 위해서라면 한 개인을 희생시키는 일이 옳지 않음에도 눈을 감았을 것이며,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이 자신이 속한 집단보다 더 큰 이익을 누리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연구진이 실험을 했습니다. 피험자들에게 점이 40개 찍힌 종이를 0.5초 동안 보여주고, 점의 개수를 추측하게 한 뒤 피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무작위로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한 그룹에는 실제 개수보다 더 많다고 추측했다고 알려주고, 다른 그룹에는 실제 개수보다 적다고 추측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두 그룹은 임의로 나누었기 때문에 실제로 40개보다 많은지 적은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각 그룹의 사람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다음 연구를 위해서 돈을 배분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도와달라고 한 것이지요. 연구자들은 두 그룹의 구분이 완전히 무작위이며, 나뉜 뒤에도 점의 개수를 추측하는 정도의 매우 사소한 특질이었기 때문에 각 피험자들이 공평하게 돈을 나눌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피험자들은 자기 그룹을 두드러지게 편애했습니다. 점의 개수를 과대평가했느냐, 과소평가했느냐의 문제였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자기 집단이 받는 금액이 상대 집단보다 크기만 하다면 더 큰 보상을 포기하고 적은 보상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합니다.

아이폰 유저들과 안드로이드폰 유저들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보면 가끔 왜 저렇게까지 싸우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실험에 나오는 점의 개수 추측 과제에 비교하면 아이폰을 쓰느냐, 안드로이드 폰을 쓰느냐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일 것임에 분명합니다. 과거 중소규모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던 때에 우리는 강력한 결속감을 느끼면서 살아갔습니다. 소규모 공동체 내의 엄격한 규율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억압하긴 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각 개인은 단단한 소속감을 느끼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규모가 커지며 소규모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도시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며 국가라는 거대한 테두리 안에서 살게 되고, 이제는 국경마저 희미해지며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그물로 묶이게 된 우리는 소속감을 잃게 됐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어디엔가 속하고 싶기 때문에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 인간들은 따로 모여서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 인간들의 모임”을 만듭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따라서 소속감이 결핍된 시대에 인간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자신이 고기를 먹는지 야채를 먹는지에 따라 소속감과 결속감을 형성합니다.

 

 

 

일단 인간이 어느 집단에 속하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그 대척점에 다른 그룹이 존재하게 됩니다.

자유나 평등이냐, 채식이냐 육식이냐, 아이폰이냐 안드로이드냐, 보수냐 진보냐, 감세냐 증세냐, 동성애를 옹호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등등 그 모든 것이 이분법적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로 세상을 나눕니다. 우리와 그들로 세상을 나누고 나면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자원을 배분해야 할 때 두 집단에게 모두 좋은 최선의 선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에게 배분되는 자원의 절대량은 현저히 적지만 자신의 집단이 얻는 이익이 상대 집단이 얻는 이익보다 상대적으로 큰 경우 후자를 택합니다. 내집단을 편애하는 현상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흑백으로 나뉜 세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찰과 분쟁으로 인해 우리는 안 그래도 부족한 자원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만약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걸 취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일까요. 결정을 잠깐 보류하고, 조금 물러서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면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 문헌 :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데이빗 맥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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