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내가 노력해서 얻은 능력을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요? | 후성유전학 Epigenetics | 용불용설 | 라마르크

RayShines 2024. 5. 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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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학 Epigenetics 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획득한 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내가 평생 연습한 피아노 실력이 아이에게 유전될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 두 요소는 DNA와 환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DNA 쪽에 더 비중을 둔다면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 것이며, 환경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각 개인에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개념을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유전은 DNA를 통해서 일어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진 DNA가 절반으로 줄어든 뒤 정자와 난자를 통해 각각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아이는 온전한 한 세트의 DNA를 보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DNA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평생 같은 DNA를 보유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말은 수정되는 당시에 DNA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면 그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가 없다는 말과 거의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질병에 대해 가족력이 있다면, 우리도 그 질병에 취약한 DNA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며, 이런 경우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위험요소가 됩니다. DNA를 바꾸기란 불가능하니까요.

 

 

 

DNA는 쉽사리 변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태어날 때의 DNA를 죽을 때까지 간직합니다.

여기서 논의가 더 진전되면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특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DNA에 새겨져 있지 않으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DNA는 바뀌지 않으니까요. 가령 운동을 열심히 해서 멋진 몸매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아이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육체를 갖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인내심과 노력, 그리고 운동의 성과가 잘 나타날 수 있는 DNA는 전달해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몸, 그 자체를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유산으로써 집을 물려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집 그 자체가 아니라 집을 짓는 재료들, 그중 어떤 재료는 양질의 재료이고, 또 어떤 재료는 다소 불량하기도 한, 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재료들로 어떤 집을 짓느냐는 아이 개인과 그 환경에 크게 좌우됩니다.

 

 

 

어린 시절에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라마르크는 유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연구한 최초의 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용불용설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동물이 기린이었죠. 높다랗게 달려있는 잎사귀를 먹기 위해 목을 늘이다 보니 목이 길어졌고, 그렇게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이 자손에게 전달되었다는 이론이었죠. 용 use 과 불용 disuse 에 따라 나와 내 자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사족으로 용불-용설이 아니라 용-불용-설로 읽는 게 맞다고 하네요. 사실 요즘에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삽니다. 유전은 유전체인 DNA를 통해 이루어지고는 것이고, 후천적으로 획득한 것은 DNA에 변화를 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후손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 학문적 합의니까요. 라마르크의 용 불용설이 폐기된 것은 아득히 예전 일이고 말입니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 후성유전학입니다.

그런데 후천적으로 획득한 그 무엇, 그러니까 경험도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이런 프로세스를 다루는 학문을 후성유전학 Epigenetics 라고 합니다. 유전유전학의 협소한 정의는 “유전될 수 있으면서도 DNA 서열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유전자 기능의 변화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이 내가 후천적으로 획득한 특징이 자손들에게 전부 전달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증거로 흔히 쓰는 것이 유대인들의 할례입니다. 우리로 치면 포경수술이죠. 유대인들은 할례를 수십 세대에 걸쳐서 지속해 왔지만 그들에게 포피가 없는 후손이 태어난 적은 없지요. 따라서 신체에 후천적으로 가해진 처치에 의한 변화가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부모, 혹은 조부모가 했던 경험이 자손에게 변화를 일으킨다는 증거는 자꾸 쌓여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산모가 겪었던 기근이 아이의 비만 위험도를 높인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기근을 경험했으니 이것이 단순히 어머니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냐는 반론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경험이 영향이 60년 이후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연구에 따르면 친할아버지가 성장기(9~12세)에 굶주림을 경험하면 손자들은 유의미하게 사망 위험이 감소하고, 반대로 풍요로운 식량 공급을 받았다면 사망 위험이 높아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겪은 경험이 나의 아이뿐 아니라 나의 아이의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식량 공급이나 기아는 나의 DNA 조성과는 무관한 완전히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식량이 적절히 공급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DNA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어떤 변화가 실제로는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어떤 자국을 남겨 후손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만약 나의 경험 하나하나가 나의 뇌에 기억으로서 쌓여가며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난 한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이런 생각이 너무 극단적으로 펼쳐진다면 먼 미래의 그 무엇인가를 위해 현재를 극단적으로 제약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 마이노리티 리포트가 다른 형태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또 매우 나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아주 먼 미래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장 10분 뒤도 내다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는 결국 현재를 살아갑니다. 내 행동 하나하나의 파급력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극단적으로 그래서도 안 되는 것 같고요. 내가 갖고 태어난 것이든, 내가 경험하는 것이든 그 모든 것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려는 극단주의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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