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세상은 전쟁터일까요? | 애니미즘 | 절대자 | 과학

RayShines 2024. 4. 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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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무력감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간단한 방식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돌도, 바람도, 강물도, 새도, 호랑이도 모두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물활론, 애니미즘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물질에도 전부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관점으로, 물활론적 시각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비가 너무 오거나 가뭄이 들면 하늘이 아프거나 화가 나서 그렇다고 설명하고, 너무 더울 때는 태양에게 언짢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활론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생명을 가진 동등한 존재이고 거기에 차등은 없습니다. 곰, 늑대, 모래, 나무 등 그 모든 것들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고, 그런 식으로 곰부족, 늑대부족, 모래부족, 나무부족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며 나와 동일시하는 대상을 숭배하는 일도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니미즘적 시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들이 너무 많았을 것입니다. 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거대한 피해를 입히는 자연재해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절대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속에서 갈고 있는 각 구성원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세상이 운영되는 방식을 전부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적 존재가 남긴 말씀이 경전으로 남아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그 말씀에 따라 인간들 사이의 위계도 결정됐을 것입니다. 귀족과 농노, 양반과 평민이 결정되는 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명령에 가까웠기 때문에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핍박받는 집단들이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밋빛 계약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 살아내면 내세에서는 반드시 좋은 곳에 가게 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달콤한 약속은 인간들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차별과 불평등과 착취를 견뎌내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씀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 세상에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들 중 매우 탁월했던 몇몇 천재들이 과학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보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수학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고 이것을 실증한 뉴턴이 있은 이후로 시공을 관통하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인간들의 열망은 과학 분야에서의 혁명을 일으키며 비과학적 사고 방식을 원시적으로 치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과 커다란 사조의 변화는 있었겠지만 여전히 과학적 사고 방식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고, 동시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과학 외적인 사고방식들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혼재하고 경합하고 보완하며 세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건조해지기 쉽습니다.

같아 보이는 두 가지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 달라 보이는 두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 이 두 가지 과정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중 전자는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모두 같은 인간인데 왜 다들 다른 생각을 갖고,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은 인간은 평등하나 모두 동일하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결과가 주어지진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은 계층과 신분의 차이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인간이 받아들이기 기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조차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각 인간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차이를 설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냉혹한 일이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이제 각 개인에게 발생하는 결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 중 하나가 그것이 피해를 입은 결과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혹은 어떤 조직인, 혹은 어떤 거대한 힘이 좋은 것들을 가져가버렸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빼앗기는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앗아간 대상이 누구인지 탐색하고 찾아낼 것이며, 어떻게든 찾아낸 그 대상을 가해자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악이 마치 누구 한 사람, 어떤 한 조직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여기며 그들을 악마화하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악의를 가진 개인이나 조직에 의해 피해를 입는 선량한 이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을 보호하고 궂하는 것이 국가와 정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불운과 무작위적 사건의 결과까지 자신에게 피해를 미치고자 의도적으로 노력한 타인의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것은 결국 세상의 모든 일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보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전쟁터가 되고 말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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