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이유 | 기억이란 | 정체성 | Identity

RayShines 2024. 4. 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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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쉽게 사라지고, 불완전하고, 왜곡되는 매우 취약한 저장매체입니다. 하지만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내가 누구일까,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우리는 늘 이런 의문을 품고 삽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 봅니다. 새로운 머리 모양을 해보기도 하고, 새로운 옷을 입어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외양이 무엇인지 찾아 나가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것이 나의 정체성 중 매우 큰 부분임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죠.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지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모습을 상상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외모를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내가 나인 것은 나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모가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일란성쌍둥이를 보면 외모가 매우 흡사해서 서로 구분이 되지 않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두 사람이 독립된 인격체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외모는 나와 타인을 변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같은 견지에서 DNA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예를 든 일란성쌍둥이는 DNA가 완전히 동일하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결국 외모나 DNA는 각 개인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완전무결한 요견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동일한 DNA와 가끔은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동일한 외모를 가진 일란성쌍둥이를 구분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기억, 즉 각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일란성쌍둥이를 완전히 같은 경험만 하게끔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외부 자극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내부적인 경험은 제각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쌍둥이는 DNA가 완전히 동일하니까 동일한 외부 자극에 대해서 동일한 내부 지각이나 내부 경험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그럴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경험이 완전히 동일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같은 방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앉아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다른 경험을 하게 되고 사소한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하니까요. 동일한 자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발생 초기 혹은 출생 초기에 주어진다면 경로에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외적 자극은 자궁 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겠죠.

 

 

 

결국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나의 기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이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든 나에게는 나만이 가진 기억의 순열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결국 나를 규정하고 나를 조정하는 것 중에 내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기억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나는 것이 있으며, 기억하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채 완전히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한 경험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의 몸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거에 완전히 얽매인 꼭두각시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권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은 늘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아픈 이별의 기억을 잊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들 하죠.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말은 그냥 단순한 유행가 가사는 아닙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없애는 것은 그 기억만 선택적으로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극에 의해서도 부정적인 감정이 발생하지 않는 무난한 경험을 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것이지요.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우리에게는 늘 기억이 쌓여갑니다.

일부러 나쁜 기억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희비가 교차하는 것이 삶의 기본적 속성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나쁜 일들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미약합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우리가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교훈으로 삼을 것은 삼고, 더 좋은 기억으로 덮어쓰기 해야 할 것은 덮어쓰기 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잘 유지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결국 나를 형성하는 블럭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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