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자칼의 날 The Day of the Jackal>을 보고 간단히 써보는 감상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많으니 주의해 주세요.
<자칼의 날>은 프레드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가 1971년 발표한 소설입니다. 소설 자체가 워낙 인기를 끈 탓에 이미 두 차례 영화화된 바 있습니다. 첫 번째 영화는 1973년 작인 <자칼의 날 The Day of the Jackal>, 그리고 두 번째 영화는 1997년 작인 <자칼 Jackal>입니다. 두 번째 영화인 <자칼>에서는 브루스 윌리스와 로버트 기어가 나왔었죠. 첫 번째 자칼을 아주 오래전에 봤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지적인 얼굴을 가진 에드워드 폭스의 자칼이 워낙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서 그런지, 브루스 윌리스가 자칼 역할을 맡는다고 했을 때 안 어울린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던 생각이 나네요. 브루스 윌리스는 지적인 이미지라기보다 위트 넘치는 미국적이고 평범한 영웅을 많이 연기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10부작으로 나온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은 에디 레드매인입니다. 그리고 그를 쫓는 인물은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여성 007 역할로 잠깐 나왔던 라샤나 린치입니다. 전작들에서는 소설을 따라 남성 캐릭터가 자칼의 뒤를 쫓았었는데, 이번 드라마에서는 시대상을 반영하여 흑인 여성 MI6 요원 비앙카 풀먼이 그의 뒤를 쫓습니다.
에디 레드메인이 주는 위약하고, 감성적이고, 어찌 보면 우유부단해 보이는 지적인 이미지가 첫 번째 자칼이 저에게 주었던 느낌과 꽤나 비슷해서 브루스 윌리스보다는 자칼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그런 이미지를 고려한 탓인지 이번 자칼은 자기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아들을 매우 사랑하는 모습도 보여 줍니다.
작중 그의 본명은 알렌산더 더간으로 저격수 훈련을 받은 영국인 스나이퍼입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 중인데 그가 타고 다니는 픽업트럭의 앞 범퍼에 Jackal이라고, 그의 동료들이 타는 트럭에는 Phantom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그의 별명이 자칼이 된 이유 같습니다. 그는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스나이퍼이며, 그의 소문을 듣고 누군가 그에게 살인 의뢰를 합니다.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의뢰를 받아들이고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이 과정이 다소 설득력이 약하긴 합니다만 아무튼 이것이 그가 군인으로서가 아닌 킬러로서의 첫 번째 살인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 다음입니다. 그와 동료들은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한 탈레반 요인 한 명을 부대로 이송하는 ‘간단한’ 임무를 받고 출동합니다. 더간은 후방에서 동료들은 지켜보다가 적의 저격수가 매복해 있는 것을 보고는 사살합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교전 시작 신호로 작용하며 그의 동료들은 결혼식이 벌어지고 있는 집에 집중포화를 가합니다. 동료 한 명이 무자비하게 대구경 중화기를 쏴대는 것을 보고 더간은 “또 저러네”라고 말을 하는데, 아마도 이런 일이 전에도 자주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은 참혹한 민간인 학살의 증거를 지우기 위해 미사일 공격으로 그 장소를 완전히 초토화합니다. 이 장면은 더간이 자칼로 사는 이후에도 악몽의 형태로 재경험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그에게 매우 트라우마틱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복귀 중 그는 앞에 폭발물이 있는 것 같다며 차를 멈춥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직접 가서 사제폭탄인지 탐지해 보겠다고 하며 나섭니다. 그는 차에서 탐지 도구를 꺼낸 뒤 차에서 무슨 스위치를 작동시키고 서서히 돌무더기로 다가갑니다. 돌무더기에 묻혀 있던 것은 세발자전거이고 동료들은 괜히 겁을 먹었다며 다시 갈 길을 재촉하죠. 그리고 더간은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는데, 그 순간 동료들이 타있던 픽업트럭 두 대가 모두 폭발하며 동료들이 모두 폭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기록 상으로는 그도 같이 폭사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가 왜 이런 선택을 내렸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차피 이유가 다를 뿐 결국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업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청부 살인으로 돈을 벌고 나니 군인으로서의 직업 정신은 사라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군인이라고 하면서 민간인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동료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가 그저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면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작중에서 보이는 그 정도의 노력을 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에 그를 단순한 냉혈한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이런 식으로 자칼이 됩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그는 Ulle Dag Charles이라는 인물의 살인을 청부받습니다. 원작에서 자칼은 샤를 드 골 Charles de Gaulle 을 저격하려고 하죠. Ulle Dag Charles이라는 이름은 Charles de Gaulle의 철자 순서를 바꾼 애너그램이라고 하네요.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는 빼어납니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영국식 액센트, 낭비 없는 무용수 같은 슬림한 몸매에 잘 맞는 사이즈의 패션은 은둔하고 있는 구도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보여주는 찰나의 표정 연기에서는 문제를 고민하는 수학자처럼 보이고, 계약을 무시하며 무례한 모습을 보인 상대 앞에서는 그간 절제되어 있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에서는 잔혹한 악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시즌 2가 확정되었다고 하던데 아마 이는 에디 레드메인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연기는 준수합니다.
그러나 그의 상대역인 라샤나 린치는 에디 레드메인에 비해 조금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 드라마에서 보이는 영국 정부 요원들이 보여주는 어떤 전형이 있지요. 일과 생활에 찌든 공무원의 느낌과 빈정거리지 않고는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듯한 어투, 그렇지만 일에 몰두할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 같은 전환,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라샤나 린치는 외형적으로도 잘 훈련된 정부 요원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고, 표정의 스펙트럼도 그다지 넓다고 보기 어려우며, 내부적으로 상당히 높은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지는 역할인데 실제로 그런 고통이 적어도 겉으로는 별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큰 눈에 다소 귀여운듯한 인상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자칼 때문에 시즌 2에는 나올 것 같지 않으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이 시리즈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자칼의 상대역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작들에서 그려지는 자칼은 신체적 능력, 사격술, 위장술, 잠입술, 목적의식, 냉혈함, 단호함 등 청부살인업자로서는 거의 신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번 자칼 역시 능력치에서는 그렇긴 하나 은퇴를 해서 아내와 아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며 자칼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전작들과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킬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킬러의 모습과 약간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대략 50분짜리 에피소드 10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즘 분위기에서는 꽤 긴 드라마죠. 워낙 빠른 호흡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 후반부로 갈수록 약간 루즈해지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킬러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즌 2도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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