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기억을 잃어가는 킬러 | 녹스 고우즈 어웨이 Knox Goes Away | 마이클 키튼 | 어쌔신스 플랜 Assassin's Plan

RayShines 2025. 4. 29. 00:00
반응형

마이클 키튼이 감독까지 하며 출연한 영화 “녹스 고우즈 어웨이 Knox Goes Away”를 보고 간단히 적어보는 글입니다.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매우 많으니 유의해주세요.

 

제 기억 속의 배트맨은 마이클 키튼입니다. 시니컬해 보이는 인상, 생각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표정은 배트맨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둠 속에서 악을 지켜보고 있는 다크 히어로에 잘 들어맞는 역설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알레한드로 이냐리투의 <버드맨>에서도 그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클 키튼이 새로운 영화에 출연할 것이고 그 제목이 <어쌔신스 플랜 Assassin’s Plan>이라는 트레일러를 보고는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쌔신스 플랜>은 나오지 않고 <녹스 고우즈 어웨이>라는 영화가 나왔길래 우선 찾아서 봤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호주에서는 <녹스 고우즈 어웨이>가 <어쌔신스 플랜>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다고 하네요. 둘이 같은 영화였던 것이지요. 마이클 키튼은 이 영화의 감독까지 맡았습니다. 각본은 그레고리 포이리에가 썼다고 합니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각본은 아마 <내셔널 트레져>일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마이클 키튼은 “존 녹스”라는 이름의 청부살인업자를 연기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신경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크로이펠츠 야곱병을 진단받습니다. 의사는 병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최대한 빨리 삶을 정리하라는 권고를 합니다. 몇 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녹스의 아들인 마일스가 갑자기 그를 찾아옵니다. 마일스는 16살짜리 자신의 딸을 임신시킨 소아성애자와 다투던 중 그를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는 녹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찾아오지요. 마일스는 녹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녹스가 이런 일을 잘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알고는 10년 넘게 왕래도, 연락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아버지가 떠오른 것이지요. 아들의 부탁을 듣고 녹스는 사라져 가는 기억력과 다투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아마 그래서 영화의 다른 제목이 <어쌔신스 플랜>이었던 것 같네요. 

 

그는 노트에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 하나 적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자신을 킬러로 영입한 친구 자비에르를 찾습니다. 자비에르는 알 파치노가 연기합니다. 자비에르는 때때로 녹스에게 전화를 걸어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아래부터는 본격적인 스포일러입니다.

 

녹스는 아들인 마일스의 집과 그 근처에 흉기와 피해자의 혈흔이 남은 옷을 숨겨두고, 그가 용의자처럼 보이게 꾸밉니다. 결국 마일스는 체포되어 구치소에 갇힙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찾아가서는 “내 세금 탈루 혐의를 밀고한 것이 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도와줄 것으로 믿고 있던 마일스는 망연자실하지요. 그런데 수사가 더 진행되면서 흉기에 남은 지문과 옷에 남은 혈흔 등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정황이 밝혀지고, 녹스가 아들에게 혐의를 덮어씌우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결론이 납니다. 형사가 마일스에게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마일스는 옥에 갇힌 자신을 방문한 아버지가 했던 말이 힌트였음을 깨닫고 “내가 아버지를 신고해서 그가 나에게 복수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로써 녹스의 계획은 완결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녹스는 대부분의 기억을 잃지만, 자신을 찾아온 아들에게 “아들이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며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만은 아직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의 말미를 보면 4년 간 자신의 연인이 되어준 연인에게 녹스가 책을 자신이 읽던 책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책이 하나 가득 들어있는 상자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펼쳐보는 책이 다름 아닌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입니다. <두 도시 이야기>도 누군가 다른 이를 대신하여 옥에 갇힌다는 설정이지요. 이 장면은 <녹스 고우즈 어웨이>가 <두 도시 이야기>의 또 다른 변주임을 보여주는 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녹스 고우즈 어웨이>는 꽤 괜찮은 영화입니다. 최상급의 스토리나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마이클 키튼의 연기와 짧게만 등장하지만 녹스의 전처를 연기하는 마르시아 게이 하든의 눈빛도 인상적입니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가 많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겠지요. 내가 누군지는 내 이름이나 얼굴, DNA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을 살면서 어떤 기억과 추억을 내 안에 쌓아나갔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나를 잃어가는 것과 같은 말이겠지요.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살아하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는 녹스의 모습에서 애틋함이 느껴지는 그런 영화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