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개념이긴 하지만 주의 과잉(hyperattention)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2007년에 캐서린 헤일스가 소개한 개념인데요,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우리에게 부족해지고 있는 딥 어텐션(deep attention)입니다.
주의 과잉이라는 말보다는 하이퍼어텐션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하이퍼어텐션이라고 말하면 그 대척점에 있는 개념인 딥 어텐션이라는 말도 더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 같고요. 둘 다 주의력, 혹은 집중력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하이퍼는 ‘과도한’이라는 의미의 접두어로 많이 쓰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어텐션은 과도한 주의 집중이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딥 어텐션은 ‘깊이 있는’ 집중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캐서린 헤일스는 두 가지를 대조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한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했습니다. 대학생인 누나가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완전히 책에 빠져 들어있는 동안, 그 옆에서는 중학생인 남동생이 헤드폰을 끼고 GTA를 플레이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누나는 딥 어텐션, 그러니까 매우 긴 호흡으로 다른 부스러기들은 무시한 채 서사에 몰입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남동생도 완전히 집중하고 있긴 합니다만, 하나의 트랙을 유지하고 있는 누나와는 달리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이벤트와 자극들에 주의를 빠르게 주입하고, 신속하게 회수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남동생이 하는 것이 바로 주의 과잉, 하이퍼어텐션입니다.
이 글을 하이퍼어텐션이 무조건 나쁘고, 딥 어텐션이 무조건 좋다는 의미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퍼어텐션 역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 중 하나입니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자극에 동시에 노출될 때가 분명히 있고, 그럴 때 주의를 신속히 투자, 회수하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럴 때조차 딥 어텐션만을 고수하면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고,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현대 사회는 비교적 매우 안전한 사회이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습니다만, 우리들의 고대 조상이 살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하이퍼어텐션은 필수적 생존 기술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사냥을 한다면 나는 포식자인 동시에, 다른 포식자들에게 완전히 노출되는 상황일테니 하이퍼어텐션 없이는 그 상황에서 사냥과 생존에 동시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딥 어텐션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 그리고 한 가지에 집중해도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시대에서나 가능한 일종의 사치품 같은 것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는 오랜 기간 꽤나 안정적인 시대를 구가해왔으며, 노동이나 전쟁의 의무로부터 벗어나있던 유한계급들이 딥 어텐션을 구사할 사치를 마음껏 누리며 과학이 발전해온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딥 어텐션하고 있을 시간은 없겠죠. 중세 시대 과학자들을 보면 대부분 귀족들인 경우가 많은 것은 이들에겐 노동의 의무가 없었고, 그래서 깊은 주의력을 동반한 장시간의 사색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는 하이퍼어텐션의 시대임이 분명합니다.
예전에는 사실 매체도 많지 않았고, 채널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매체의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났고, 하나의 매체 안에서 채널의 숫자는 거의 무한하며, 컨텐츠의 종류와 폭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대략 34기가바이트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대략 영단어 10만 개 정도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장편 소설의 분량이 8만~10만 단어 가량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10만 개 정도의 영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니 대략 용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걸리버 여행기 정도 되는 분량의 소설을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수 있나요? 두서너 줄 남짓되는 메시지는 수백 개, 어떤 때는 천 개 넘게 읽을 수 있지만, 단편 소설 한 권 읽는 것은 어렵죠. 우리가 지금 하이퍼어텐션을 사용하는 것에는 매우 익숙해져있지만, 딥 어텐션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숏폼 컨텐츠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죠. 이제는 100분짜리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보다 두 시간 동안 숏폼을 스크롤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이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주도적으로 그 결정을 내린다기 보다는 그저 스크롤하다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하이퍼어텐션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딥 어텐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고, 여러 번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지적 기량은 발전하고 성숙하며 그 깊이와 폭을 더하며 지식의 체를 형성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씩은 속도를 늦추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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